나만의 서른살 되기

중학교때부터 지금까지 약 15년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언제나 '이것만 하면..!'의 반복이었던것 같습니다. 시기별 과업이었던 '이것'만 해낸다면, 앞으로의 인생이 풀리고 모든게 다 잘 될거라고 생각했던거죠. 내가 고등학교만 붙으면, 내가 대학교만 붙으면, 내가 대학원만 붙으면, 내가 전문연만 붙으면. 지금은 '내가 전문연만 끝내면'과 '내가 박사만 받으면' 상태구요. 그런데 뭔가를 겨우겨우 힘들게 해내고 나면 모든게 다 잘되는게 아니라 새로운 과업이 쏟아지더라구요. 그래서 '언제쯤 이 모든게 다 끝나지?'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래도 다 이뤄내셨네요"라고 해주셔서 그제서야 제 인생을 좀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어느새 이뤄낸게 많더라구요 새삼.

저는 항상 주어진 상황과 운이 굉장히 좋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웠던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입시까지는 물론 힘들었지만 어찌 잘 되었었는데 스무살부터 시작했던 스타트업들은 죄다 말아먹었고 학부 졸업에만 7년이 걸렸으며 대학원도 재수했고 전문연도 휴학까지 해가면서 아슬아슬하게 붙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를 가장 괴롭혔던건 '조급함'이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저처럼 인생이 꼬이지 않고 제때에 주어진 과업을 이뤄내서 지금은 다들 사회의 일원이 되어있습니다. 일찍 박사 받고 벌써 교수 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로스쿨이나 의전/의대를 간 친구들도 어느새 변호사, 의사가 되어있더라구요. 이렇게 왕도를 따라 승승장구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몇년을 '아 나도 빨리' 하는 조급함 속에서 살았던것 같습니다. 저만 제자리걸음 하는것 같고 막 인생 망한것 같고 그랬죠. 그럴때마다 주변에서 "나중 가면 몇년 차이는 별거 아니야"하는 조언을 많이 받았으나 조급함이 없어지진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50살까지의 인생 계획을 세웠었는데, 꿈은 크게 가지라길래 서른살까지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학위 받겠다고 써놨습니다. 근데 저는 지금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박사까지는 아직도 한참, 하아아아안참 남았죠. 처음엔 이 괴리감이 해소가 안되어서 '다 망했는데 이제와서 열심히 해봤자 뭐해'라는 생각에 아무것도 안한채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냈습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좀 살펴보니, 생각보다 저처럼 '인생이 꼬인' 사람이 많더라구요? 다들 여차저차 해서 인생이 꼬이고, 그걸 뒷수습하느라 이것저것 노력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그건 인생이 '꼬이고', '뒷수습' 하고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사는 하나의 삶인것 뿐이었습니다. 애초에 꼬이거나 풀리거나 할게 없는거였죠.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거였습니다. 일찍 성공한 친구들은 물론 부럽긴 하지만 잘 세어보니 정말 한줌이었고 그들도 그들만의 우여곡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저랑 똑같이 군대도 안간채로 학부 7년씩 다닌 사람도 찾아보니 놀랍게도 바로 주변에만 한트럭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는건 딱히 '꼬인'게 아니며, 꼬이고 말고 한게 아니었던 것이죠. 어떻게 살고 있든, 그냥 인생 사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다들 원래 그렇게들 살아" 하는, 때로는 무책임한 얘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좀 조심스럽지만, 저는 이렇게 사람들을 더 만나고 여러 인생 얘기들을 들으면서 그제서야 "나중 가면 몇년 차이는 별거 아니야" 하는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못다한 일부터 하자' 해서 몇년 전부터 저만의 '서른식'을 준비하게 되었죠. 코스웍 수료에 문제가 없도록 항상 주의해서 학기를 보냈고, 제일 큰 문제였던 군대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사 시험도 여러번 보고 휴학 한 채로 텝스 학원도 다니고 하면서 올해 9월, 드디어 전문연을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운전면허도 따서 지금은 제 차로 출퇴근 하고 있습니다. 밴드, 스타트업 등 과거 활동들을 혼자 정리하는 시간도 가졌고, 좀 큰 자취방으로 옮기면서 저만의 안식처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PT 받으면서 운동도 하게 되었고, 샐러드 먹으면서 식단, 건강 관리도 하고 있습니다. 돈 관리도 제법 어른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고, 매일 아침 지각하던 습관도 완벽하게 고쳐냈습니다. 충치나 안구건조증처럼 몸 여기저기 아팠던 부분들을 치료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울증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저는 약 2년간 우울증+조울증으로 극심한 불면증과 '반추'에 시달리고 있었는데요, 꾸준한 병원 치료와 모종의 운으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랑니 뽑는걸 깜빡해서 다음달로 예약 잡아놨습니다. 책, 게임, 영화를 다양하게 즐겼고 뮤지컬이나 클래식 공연도 많이 보러다녔습니다. 시계도 하나 맞췄네요. 일기는 고등학교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쓰고 있지만 이제야 "getting things done"을 좀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안맞을줄 알았던 PM 역할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이콘에서 발표도 했고 신념 따라 다양한 활동도 해봤습니다. 사랑하며 살고 있구요. 여기까지 오는데 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저는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주면 어떻게든 회생할 수 있고 또 새로운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자신이 되어도 충분한것 같습니다. 나를 믿기 위해서는 성과에 대한 기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비록 작은 성과더라도 하나하나 나열해보며 인생을 되돌아보고 나니, 고등학교때 세웠던 계획과의 괴리보다 그걸 넘어서서 이뤄낸 뜻깊은 성과들이 더 많았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대는 항상 조급한 마음으로 '이것만 하면..!'을 반복해왔는데, 서른이 된 저는 그동안 이룬 성과들에 대한 기억들을 동력 삼아서 앞으로의 과업들을 해낼 수 있을것 같습니다.